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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레알 마드리드

딜레마 해소?

오랜만입니다. 잘들 지내셨나요?

 

 

1월 경기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던 건 여러분이나 저나 매한가지였겠지만 이미 팽배한 부정적인 여론에 기름 끼얹을까봐 혼자 삭이고 있었는데 비슷한 주제를 조금 긍정적으로 풀어볼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팀의 딜레마는 크카모에서 출발합니다. 시즌 초 허접한 공격 일변도 축구가 한계를 드러내자 크카모를 활용한 4-3-3으로 돌아와 밸런스를 잡았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크카모에 계속 의존을 하다 보니 결과는 그럭저럭 챙기지만 팀의 고점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게 너무나 쉽게 드러났고 시간이 지나며 팀의 전반적인 기동력이 내려오자 전환에서의 약점이 도드라져 게임을 굉장히 어렵게 풀어가던 게 코파 빌바오 전까지의 상황이었죠. 카세미루가 없었다지만 사실 그라나다 전 전반전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럼에도 크카모를 고정적으로 기용해왔던 건 아마 명분의 문제도 있었을 테고, 다른 선수를 고정적으로 기용하기 위해서 해야 할 팀 차원에서의 전술적 준비가 생각보다 꽤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명분 문제부터 들여다 보면, 안첼로티가 취하는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친화력을 바탕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리더십의 단점이 드러난 거라고 봐야 하겠죠. 위기를 겪고 변화를 맞이해야 할 때의 대응력이 권위와 카리스마로 팀을 통제해나가는 유형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변화의 시그널을 감지하더라도 프라이드 강한 선수단과 과정에 대한 이해나 배려따윈 없는 팀 내외부의 분위기에서 나올 반발을 생각하면 감독이 생각한 바가 있더라도 그걸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지단이나 무리뉴면 모를까.. 그렇기에 계기가 필요한 거고요. 돌이켜보면 4-4-2를 포기하고 아자르와 발베르데를 벤치로 보낼 때에도 1무 2패로 세 게임을 내리 박은 후에야 그런 결정을 내렸었죠. 그라나다 전 이전 기자회견에서 로테이션 관련 답변을 할 때 체력 얘기보다 선수의 자신감이나 팀 상황을 우선적으로 얘기하는 거 보면 이런 상황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로테이션의 의미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게 시스템 변화, 경기에 대한 접근 방식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듯.

 

 

전술적 준비 얘기를 하자면, 저는 모드리치를 발베르데로 대체한다고 할 때 지금 시스템에 그냥 둘만 바꾼다고 하면 팀이 절대로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봅니다. 지금의 시스템에선 사실상 모드리치가 혼자서 우측면의 짜임새를 모두 만들어가는 선수이기 때문입니다. 발베르데는 굉장히 좋은 선수고 이런저런 국면에 기여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한쪽 사이드의 틀을 혼자서 짜맞출 만한 기술적, 플레이메이커적 기질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팀 구성을 유지하면서 모드리치를 발베르데로 바꾸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보강 작업이 우측면 전후방 모두에서 있어야만 해요. 근데 이건 감독이 세밀하게 봐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론 발베르데와 함께 발을 맞출 우측면에 관여하는 선수들의 기량에서의 발전 역시 동반이 되어야 하는 거라 그리 쉬운 과정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발베르데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모드리치에게 기대고 있던 우측면 체계에서 벗어나 우측 밸런스를 지금보다 더 강하게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팀의 고점도 끌어올릴 수 있고 발베르데도 그 안에서 플레이 컨셉을 이전까지보다 더 확실하게 잡고 필드의 높은 영역에서 활개치고 다닐 수 있어요.

 

 

모드리치가 지금의 시스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는 이미 설명한 바 있고 이걸 이어받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후방과 미들에서 우측면으로 향하는 볼의 빈도와 질을 더 끌어올려야 합니다. 빌드업에서 좀더 횡적인 접근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단에 비해 안첼로티는 그 과정을 좀더 심플하게 가져가길 원했고 대신 위협적인 듀오를 형성한 비니-벤제마 조합에게 더 빠르게 공을 전달하는 걸 추구했는데, 그 차이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 빌드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센터백입니다.

 

지단 하에서의 라모스의 패스 스탯
안첼로티 하에서의 알라바의 패스 스탯

 

두 감독 하에서 후방 전개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센터백들의 스탯을 가져왔습니다. 두 선수의 스탯에서 가장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제가 빨간 박스로 하이라이트를 준 부분인 스위치 패스, 즉 횡전환의 비중입니다. 90분당 4~5회를 기록한 라모스에 비해 알라바의 횡전환 비중은 없다시피 한 수준입니다. 이 강력한 옵션이 사라진 탓에 현재 팀에서 우측면의 속도를 붙이는 작업은 꽤 제한적이며, 이를 주로 맡아줄 모드리치나 카르바할의 부담은 이전 시즌들보다 더 커졌습니다. 이러니까 안첼로티가 모드리치를 내내 갈아댄 거고요. 대신, 위에 올린 스탯표에선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알라바는 왼발잡이라는 점과 다년간의 레프트백 경험을 살려 왼쪽에서 종 방향으로 볼을 전진시키는 데 더 능숙합니다. 오버래핑의 빈도나 질도 라모스보다 낫고요. 좀 나쁘게 말해 원툴 수준인 안첼로티의 비니-벤제마 조합 구성에 큰 공헌을 한 셈입니다.

 

 

왼발잡이와 오른발잡이의 킥이 다르긴 하지만, 제가 보기에 알라바는 라모스만큼이나 좋은 킥을 가지고 있고 알라바의 사이드체인지 비중을 늘리는 건 우측으로 향하는 후방 지원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좋은 방안일 겁니다. 그러나 왼쪽에서 내고 있는 알라바의 효용을 굳이 건들고 싶지 않다면, 밀리탕이 조금 더 나서서 알라바가 왼쪽에서 하는 것들을 오른쪽에서도 시도하게끔 해야겠죠. 자질이 없진 않습니다. 이 팀에서의 모습은 형편없었지만 풀백 경험도 있는 선수고 볼을 달고 올라가거나 하는 플레이에 대한 자신감도 있고요. 지금 밀리탕이 안고 있는 커버 범위나 부담을 감안하면 쉽지는 않아보이지만 이상적인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아요.

 

 

이게 개선이 되면 다음 단계는 우측면 전방에서의 효율을 끌어올리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건 오른쪽에 서는 윙이 공을 몰고 자력으로 상대 수비를 제껴내는 겁니다. 어차피 조공의 개념이니까 비니마냥 두세명씩 제끼면서 차력쇼를 할 필요도 없고 한명만 벗겨내고 다음 플레이를 가져갈 역량만 있으면 됩니다. 이미 카르바할과 발베르데는 그에 맞춰서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으니까요. 근데 그런 선수가 팀에 없습니다. 호드리구가 그나마 좀 되는 듯 했지만 후반기 들어서면서 영 좋지 못하고요.

 

1월 경기들에서 가끔 나왔던 상황 예시. 오른쪽 유닛 셋이 가운데 까만 공간을 전혀 커버하지 못하고 터치라인 근처에 모여 있으니 크로스가 오른쪽을 바라보는 순간 상대는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대비할 수 있다. 당연히 공격이 진행될 수가 없음.
엘체 전 아자르의 포지셔닝과 전반전 히트맵. 오른쪽으로 공이 전개되는 상황인데도 중앙지향적인 포지셔닝을 유지하며 상대 레프트백을 끌어냈고 덕분에 터치라인 쪽으로 넓은 공간과 패스 루트가 쉽게 열렸다.
그라나다 전 아센시오의 포지셔닝과 히트맵. 맨 위 그림과 같이 크로스가 오른쪽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상대 수비수들을 가운데로 당겨 놓으니까 카르바할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이게 불가능할 때 다음으로 중요한 건 포지셔닝입니다. 좋은 포지셔닝으로 상대 수비를 끌어당기고 공간을 만들어서 동료들과의 조합 플레이의 질을 끌어올려야만 합니다. 이것에 관해서 안첼로티는 엘체 전 아자르 기용을 통해 약간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발 윙어인 아자르를 넓게 벌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프스페이스에 묶어놓고 거기서 플레이를 시작하게끔 했습니다. 이건 위에 제가 만든 그림같은 상황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단 사이드체인지를 못 쓰는 걸 넘어서 오른쪽에서 공을 받더라도 돌파도 못하는 주제에 저렇게 셋이 터치라인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아무것도 할게 없습니다. 그러니 아자르를 하프스페이스에 고정시켜서 상대 레프트백의 시선을 잡아두고 터치라인을 열어서 바스케스나 모드리치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낸 거죠. 공을 잡게 되면 터치라인보단 중앙으로 움직이게끔 해서 크카모와 비니-벤제마 사이의 공간을 메꿔보게끔 했고요. 그라나다 전 아센시오 활용도 결이 비슷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왼발잡이라 골대를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우니까 드리블보단 슈팅 포지션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더 짙었다는 것 정도.

 

 

1월의 답답한 경기들을 보며 제가 가장 불만스러웠던 건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설사 발베르데를 안 쓰고 모드리치를 계속 쓴다고 하더라도 시즌을 길게 본다면 오른쪽을 보강하는 작업은 이뤄졌어야 하는데 꾸역꾸역 계속 이긴다고 감독부터가 무사안일주의에 빠진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었고요. 엘체 전 아자르가 나쁘진 않았다지만 거기에서 뭔가 더 연속성을 가져간 것도 아니었고 그 이후로 빌바오에게 줘터지고 그라나다에게도 전반 내내 고전했던 게 '하던 대로'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라나다 전 후반에 발베르데를 투입하면서 안첼로티가 가져간 전술 변화는 제가 위에서 길게 떠든 걸 거진 다 수반하고 있었습니다. 후방에서의 지원은 크로스를 중앙으로 당겨 오른쪽으로 볼을 더 편하게 보낼 환경을 마련해준 것과 밀리탕의 오버랩으로, 전방에서의 짜임새는 횡적으로 넓게 움직일 수 있는 이스코를 펄스 나인으로 배치해 우측면의 숫자를 늘림으로서 맞췄습니다. 틀이 어느정도 잡히니까 발베르데도 평소보다 높은 위치에서 날뛸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팀 경기력도 월등히 좋아졌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임시방편이었는지는 몰라도 답을 모르진 않았던 겁니다. 어쩌면 카르바할이 돌아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요. 마스터키까진 아니지만 카르바할이 있으면 전후방에 걸친 많은 문제들을 굉장히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그랬다면 그것대로 좀 답답해지긴 합니다만...

 

해답으로 올라설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 않는 건 지금도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글에서 1월부터는 준비를 해야 챔스에 맞춰서 팀 수준을 한번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거란 얘길 했는데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안첼로티 입장에선 변수를 최대한 줄여놓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실험을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거기에만 매달려 있으면 팀은 나아갈 수가 없죠. 그런데도 자꾸 핑계거리들을 찾고 그 탓을 하는 걸 보면 그라나다 전의 성과는 쓸 만한 플랜 B를 찾았단 입장이고 여전히 우틀않 마인드에 갇혀 있는게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답은 다 나왔고 이제 남은 건 이걸 원래 구성과 잘 버무리는 것 뿐인데 그라나다 전의 모습이나 지단의 사례를 보면 그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걸 못하거나 너무 늦어서 기회를 날려먹는 바보가 아니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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