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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경기 리뷰

vs 샤흐타르

ㅎㅎ

 

걱정했던 부분이 많았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 좋은 모습으로 대승을 챙겼습니다. 제가 떠든 게 무슨 영향이 있겠냐만은 우려스럽게 봤던 부분들을 잘 짚어냈고 대응도 준수했습니다. 특정 선수들이 궤도에 올라오면서 좋아진 부분도 있었고 시스템적으로도 안정감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꽤 먼 거리의 원정이었고 지난 시즌의 나쁜 기억 탓에 쉬운 경기는 아니었을 텐데 보름 넘는 시간이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한 모양입니다.

 

 

"4-4-2는 실패했다. 4-3-3으로 경기해야 한다." 는 얘기의 요지는, 공이 없을 때 3열로 수비하는 걸 포기하겠단 얘기입니다. 안첼로티가 3열 대형을 선택한 건 전방에 많은 선수들을 균일하게 배치하여 상대를 강하게 압박해 공격의 시작 지점을 끌어올리고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기 위함이었는데,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디테일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선수단도 이런 걸 실행하기에 적합한 자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압박한다고 우르르 올라갔다가 수비라인을 그대로 노출하고 중앙이고 사이드고 다 내주기만 하는 수비 국면을 지난 졸전들에서 여러 차례 감상할 수 있었던 거고요.

 

 

위에서 얘기한 이런 걸 실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원엔 카세미루도 포함됩니다. 비록 생각보다 종적으로 긴 거리를 오르내리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는 선수는 아니긴 하지만, 카세미루의 장점은 높은 위치보단 수비라인 앞에서 더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졸전 3연전 전후로 팀의 경기력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카세미루의 퍼포먼스에 대한 비판도 같이 늘어났는데, 개인적으론 안첼로티 때문에 안먹어도 될 욕을 먹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복잡할 것 없이 그냥 수비라인 앞에 제대로 자리만 잡게 해주면 감독도 편하고 보는 팬들도 편해질 걸 괜히 욕심을 부려서 선수까지 망가뜨린다고 느꼈거든요. 아예 개박살이 나서 빨리 생각을 고쳐먹었으니 다행이지 어쭙잖게 공격수 때려박은 게 잘 먹혀서 꾸역꾸역 결과 챙기고 하다가 그 고집이 더 갔으면 진짜 대참사가 났었을 거에요.

 

 

어쨌든 실패를 인정하고 카세미루를 수비라인 앞에 돌려놓자 많은 부분이 좋아졌습니다. 중앙에 미드필더가 셋이 배치되면서 중앙 블록이 두툼해졌고 양 윙어들이 모두 수비 블록으로 내려와주니까 누군가가 커버 범위를 더 넓게 가져가거나 재조정할 필요 없이 수비 블록이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면서 상대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에 따라 4-1-4-1/4-4-1-1로 변형해가며 4열 수비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이를 통해 미드필드 구역에서 강한 압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균일한 수비 형태를 유지하게 되니 상대에게 사이드를 열어주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4열 배치를 통해 상대의 3선을 꾸준히 방해해 상대가 후방에서 측면으로 크게 때려넣는 걸 방해할 수 있었고 차근차근 썰어들어와도 카세미루가 접근해서 간격과 숫자 싸움에서의 우위를 유지해주니까 상대 윙어들도 함부로 까불기가 어렵죠. 그러면서도 2선과 미드필드에선 카세미루의 커버가 있으니까 외려 3열로 수비할 때보다 더 강하게 상대를 몰아붙일 수 있습니다. 매번 욕먹던 바스케스나 모드리치의 수비 퍼포먼스가 이번 경기에서 크게 거슬리지 않았던 건 카세미루의 영향이 굉장히 컸다고 볼 수 있겠죠.

 

셰리프 전과 에스파뇰 전의 수비 꼬라지. 라인 형성도 개판이고 사이드로 공이 가는데도 시선조차 안간다.
샤흐타르 전 수비 형태. 미드필드에서 저지선 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자리를 잡으니까 마크맨을 놓칠 일도 없다.

 

 

더불어 홀이라 일컫는 수비 앞공간을 전담하는 선수가 생기니까 수비수들이 극단적으로 좁혀서지 않아도 채널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들어오는 각을 한번씩 잡아주니까 상대의 전진 패스에 대한 대응도 훨씬 기민해지고요. 가끔 상대가 측면을 뚫어내고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려도 카세미루가 박스 안에서 수비수들이 신경쓰지 못하는 자리를 커버해주니까 크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도 않죠. 수비 방식이 확 좋아지니까 수비수들의 스탯 양상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수비라인 앞이 쉽게 열려 공격수들과 직접 맞딱뜨리는 빈도가 잦았던 지난 두 경기에선 비교적 태클 스탯이 많이 잡히고 드리블을 상대하는 빈도가 높은데 반해, 이번 경기에선 태클 비중이 줄고 드리블을 상대하는 스탯은 아예 없으며 대신 인터셉트 횟수가 늘어난 게 눈에 띕니다. 뻔한 패스들이 많아졌단 얘기입니다.

 

vs 셰리프 수비진 수비스탯
vs 에스파뇰 수비진 수비스탯
vs 샤흐타르 수비진 수비스탯

 

 

 

전반부터 비교적 수월하던 수비에 비해 공격은 그리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크카모를 꺼내든 만큼 안정성은 올라갔지만 전방으로 튀어나가는 속도는 느려지기도 했고, 샤흐타르도 최근 상대들과 마찬가지로 비니시우스를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지면서 주도는 하는데 성과는 딱히 없는 양상이 지속됐습니다. 상대는 강한 압박을 시도해 후방에서의 롱패스를 유도했고 더블 볼란치를 세워 수비 앞을 든든하게 지키고자 했지만, 때때로 미들 압박을 포기하면서까지 비니시우스를 견제했습니다. 그 덕에 중거리도 꽤 쏠 수 있었고 한번 압박을 풀어내서 올라오면 미드필더들은 별 제약 없이 본인들의 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뒷공간이 꽤 열렸음에도 비니시우스는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습니다. 공만 잡으면 이중 삼중으로 둘러싸는 건 물론이고, 끈덕지게 달라붙던 도도가 미처 복귀하지 못한 역습 상황에서도 오른쪽 윙으로 나온 테테가 전력질주하며 비니시우스를 쫓는 장면도 나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상대가 비니시우스에게 과도할 정도로 집중하면서 자연스레 반대편의 호드리구에게 공간이 많이 생겼고 팀도 그 방향으로 공을 적극적으로 때려넣으면서 호드리구가 1대1로 상대 수비를 맞이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그다지 효과적이진 못했습니다. 피지컬과 기술을 십분 활용해 1대1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선수도 아니고, 오른발잡이라 1대1을 이겨내도 골대를 직접 노리기가 어려웠으며, 뚫어내서 크로스를 올려도 어차피 박스 근처엔 벤제마와 비니시우스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대가 대처하기도 쉬웠죠. 이런 상황은 비니시우스에게 가야 할 상황이고, 호드리구는 보다 많은 선택지가 놓인 상황에서 영리하게 협업을 활용할 때 더 효율을 내는 선수입니다. 실제로 자책골을 유도한 장면도 우측면에서 호드리구 주도로 상대 압박을 풀어나오면서 나온 장면이었고요.

 

 

그래서 안첼로티는 후반에 변화를 줬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측면에서 움직이는 선수들의 동선이었습니다. 굉장히 넓게 벌려서던 양 윙포워드가 조금 더 중앙으로 좁혀 섰고, 대신 중앙에 서는 선수과 풀백들이 측면으로 조금씩 더 움직였습니다. 특히 공을 달고 움직일 수 있는 벤제마와 모드리치가 양 측면으로 움직이는 빈도가 늘어났고 그에 맞추어 호드리구와 비니시우스는 중앙 방향으로 동선을 잡고 움직이는 빈도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빌드업의 빈도를 늘렸습니다. 오른쪽에서 볼이 출발해서 미드필드를 거치며 왼쪽으로 이동하는 빌드업 루트를 자주 시도했고 이를 통해 호드리구와 비니시우스의 장점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협업에 장점이 있는 호드리구는 조금 더 아래쪽에서부터 공을 만지면서 전진할 수 있었고 집중 견제에 시달리던 비니시우스는 오른쪽으로 쏠린 상대의 시선에서 벗어나 비교적 넓은 공간에서 마크맨을 떨쳐낸 채 공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비니시우스의 족쇄가 풀렸고 약 20여분만에 세골을 만들어내며 그 진가를 입증해냈죠.

전후반 비니시우스에게 향하는 견제의 차이
전후반 벤제마와 비니시우스의 위치 변화. 바깥쪽으로만 돌던 전반에 비해 후반엔 박스로 훨씬 붙었다.
전후반 어태킹 써드에서의 공격 방향 비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공격이 많던 전반에 비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거친 후반엔 왼쪽 공격이 훨씬 늘어났다.
크로스의 전후반 히트맵과 패스맵 비교. (상) 히트맵 (하) 패스맵 (좌) 전반 (후) 후반. 비교적 중앙에서 반대편으로 크게 때려넣는 패스가 많은 전반과 달리 후반엔 활동반경이 좀더 측면지향적으로 바뀌었고 패스의 방향도 왼쪽으로 향하는 빈도가 더 높다.
전후반 벤제마와 모드리치의 히트맵 비교. (상) 모드리치 (하) 벤제마 (좌) 전반 (후) 후반. 둘다 전반에 비해 후반에 측면으로의 이동 빈도가 더 많다.

 

 

이 과정에선 상대의 도움도 크게 따랐습니다. 전반전 샤흐타르의 압박은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피지컬이 좋은 페르난두가 센터백들을 상당히 타이트하게 따라붙어줬고 양 윙엔 기민한 솔로몬과 테테가 아래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기동력을 더해줬고요.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서 미드필더 중 가장 후방에 남은 마이콘이 좀 고생하긴 했지만 그 덕에 전반 내내 롱볼 유도를 꽤 지속적으로 해내면서 경기를 비교적 팽팽한 양상으로 끌고 갔는데 할만 하다고 느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후반에 전방 체계에 손을 대며 이걸 스스로 무너뜨렸습니다. 피지컬로 센터백들에게 부담을 주던 페르난두를 측면으로 돌리고 미드필더로 뛰던 페드리뉴와 패트릭을 전방으로 올려 그 부담을 스스로 없앴고 기민함과 지구력을 갖춘 솔로몬과 테테를 다 빼버리고 상대적으로 둔한 페르난두와 늙은 마를로스를 측면에 배치해 기동력을 줄여버렸습니다. 마르쿠스를 넣어 중원을 보강하긴 했지만 센터백들이 편해지고 측면이 확 느려지면서 레알의 빌드업 부담은 확 줄어들었고 때문에 전반처럼 마이콘이 비니시우스를 항상 시야에 두고 쫓아다니는 양상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반에 비니시우스는 도도와 편하게 1대1 상황을 많이 맞이할 수 있었죠.

 

 

 

물론 마냥 잘된 것만 있는건 아닙니다. 전반처럼 윙포워드들을 한껏 벌려놨을 때 볼이 측면으로 나갔다가 다시 중앙으로 들어오는 과정,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방식은 조금 더 손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크로스가 오면서 방향 전환이 수월해졌고 후반엔 측면으로 움직이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중앙과 측면 간 공을 주고받으면서 상대 시선을 끌어당기는 작업의 완성도는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아직 어린 선수들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고... 또 카세미루로 방어막을 한겹 더 세우긴 했지만 여전히 상대가 최후방에서 공을 다룰 때 너무 많은 숫자가 달려듭니다. 롱볼을 유도하기 위해서 달려드는건데 아군 후방에도 숫자가 너무 없어서 킥이 조금만 날카로워도 아찔한 상황이 조성됩니다. 예전처럼 수비수들이 전부 깡패같은 경합능력을 갖췄을 땐 좀 덜할 텐데 지금은 카르바할도 없고 밀리탕은 몰라도 알라바는 경합에 아주 강한 캐릭터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안정감을 조금 더 챙길 필요가 있어보여요. 그래도 큰 틀 자체는 비교적 잘 잡은 편이라 이런 디테일들을 잡는 건 충분한 관심만 있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에요. 경기 전후로 인터뷰를 보면 문제 인식은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것 같고, 여전히 선수빨을 땡길 수 있는 부분도 남아있고요. 변화를 통해 대승을 챙겼으니 이 방향성을 잃지 말고 앞으로도 좋은 축구 해나가길 바랍니다. 축구를 잘하면 성적은 알아서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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