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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레알 마드리드

실험이니까 괜찮다?

안 괜찮아요.

 

 

1무 2패라는 결과도 결과인데 세 경기동안 보여준 과정도 되게 일관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시즌 개막할 즈음에 9월까진 프리시즌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도 했었기 때문에 에스파뇰 전 끝나고 글을 쓸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엊그제 미루고 미루던 셰리프 전을 보고 나서는 얘기를 좀 해야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가장 큰 이유는 이게 단순히 선수나 포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에요. 세 경기 모두 라인업도 다르고 포메이션도 다르고 노림수도 달랐지만 경기 중에 발생하는 문제는 다 비슷했습니다. 퀄리티를 따지기 이전에 접근법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인업에 기상천외한 짓을 해봐야 실험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발베르데를 풀백으로 돌리고 14-15시즌을 연상케 하는 4미들을 꺼내봐야 베이스가 별로면 프리시즌에나 할 선수 테스트 이상의 의의를 갖긴 어렵단 얘기.

 

 

 

인터뷰에서든 실제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든 안첼로티가 가장 강조하는 건 종으로 나가는 속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개막 이후의 득점 기록을 보면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야 한다는 명제 자체는 선수들에게 잘 주입시킨 것 같아요. 기복은 좀 있지만 시즌 초반부터 근 두어 시즌간 보기 어려웠던 다득점 경기들을 뽑아냈으니까요. 앞이 열렸을 때 선수들이 달려나가는 속도나 반응도 좋은 편이고요. 문제는 10월에 접어들었음에도 이 명제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거에요. 딱 이것만 던져놓고 이걸 뒷받침할 무언가를 새로 내놓지를 못하니까 상대가 대응법을 내놓는 시점부터는 공격은 답답해지고 수비는 헐거워지죠.

 

 

 

쭈욱 얘기해온 대로 안첼로티의 마드리드는 공을 가졌을 때 횡 방향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속도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측면으로 크게 때려넣으면서 고속도로를 내는 건 많이 좋아졌는데 지공으로 전환이 됐을 때 횡으로 공을 움직이면서 상대의 시야를 흔드는 작업의 수준은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측면에서 움직이는 숫자는 거의 정해져 있고 그 방향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볼의 퀄리티와 인원들 간 협업의 수준도 좋지 못하죠. 셰리프 전처럼 의도적으로 한쪽 측면에 힘을 실어주는 시도도 있었지만 크게 효율적이지 못했던 건 거기서 나오는 수적 우위와 어그로를 팀 차원에서 소화할 만한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어떤 양상이 펼쳐지냐면 어태킹 서드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횡 방향으로 힘을 실어주는 건 벤제마에게만, 종으로 속도를 내는 과정은 비니시우스에게만 기대고 있어요. 이런 조합을 처음 짰을 때야 둘 컨디션도 워낙 좋았고 팀 차원에서 앞으로 공을 빠르게 보내는 메커니즘 자체는 많이 좋아졌으니까 잘 먹혀들었는데 비니시우스가 좋아진 건 결국 박스 안에서의 마무리지 근본적으로 선수 퀄리티가 확 업그레이드가 돼서 영향력을 전후좌우로 흩뿌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게 파악이 되고 난 후로는 전부 내려앉아서 비니시우스만 보는 걸로 대응해버립니다. 아무리 빨라봐야 활동 범위는 예전이랑 똑같으니까 두세명 붙여놓고 박스 안으로 들어오는 루트만 잡아버리면 무서울 게 없는 거에요. 셰리프 전 네명씩 움직여봐야 뭐해요. 어차피 왼쪽에서 최종적으로 볼이 가는 건 비니시우스고 비니시우스가 유의미하게 뭘 하도록 도와주는 건 벤제마밖에 없는데요.

최전방 공격수가 수비진 제외한 선수들 중 패스를 제일 많이 하고 비대칭을 하든 뭘 하든 상대 수비는 비니만 보고 있다. 둘만 막으면 땡

 

 

요새 들어 더 심각하다고 느끼는 건 공이 없을 때 이 팀의 대처 방식이에요. 이 팀은 수비할 때 전방에서든 뒤로 물러나서든 4-4-2 형태를 고수하는데, 앞으로 빠르게 나가야 한다는 명제에 매몰되어 있으니까 선수들의 시선과 스탠스가 죄다 공과 전방으로 쏠려 있습니다. 이러니까 4-4-2로 수비 대형을 갖추는 것의 목적인 균일한 공간 배분과 치밀한 라인 간격 유지가 잘 되지 않고 상대가 아군 라인 사이에서 종으로 패스를 몇차례 주고받으면 우왕좌왕하면서 수비 대형이 너무 쉽게 무너져내립니다. 가뜩이나 수비 대형이 3열로 형성되기 때문에 수비라인이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부담을 안아야만 하는데 전방압박을 한답시고 6명이 올라갔다가 상대가 빈틈을 찾아 전진패스를 한 번만 성공시키면 공격진이 바로 아군 수비라인과 맞딱뜨리게 되고 최소 40m 이상을 후퇴해야만 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이건 하프라인 아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대형을 갖추긴 갖추는데 그리 치밀하지도 못하고 자리를 잡고 상대 공격을 측면으로 밀어내면서 수적 우위를 확보하기보단 공에 시선을 두고 공을 주고받는 사람을 쫓아다니니까 라인에 균열이 일어나 수비 사이의 공간이 쉽게 노출됩니다. 이걸 막아보려고 잔뜩 좁혀서면? 사이드가 열립니다. 팀도 그걸 의식은 하고 있지만 딱히 대처법을 내놓지도 못하고 근본적인 스탠스도 포기하질 않으니까 상대가 수비 앞에서 더미 플레이만 몇번 가져가도 바로 풀백이랑 1:1을 만들 수가 있고요. 어찌어찌 막히면? 반대편 크게 열렸으니까 사이드체인지 때리면 됩니다. 잔뜩 좁혀놨기 때문에 별로 정교할 필요도 없음. 이걸 못하게 패스 방향을 제어할 만큼 이 팀 전방과 2열 선수들의 압박이 섬세하고 치밀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실점 직전 측면으로 패스가 나가는 상황. 다른 거라곤 수비라인의 높이와 좌우 뿐이다.

 

 

초반에 이정도는 괜찮다는 몇몇 여론과 다르게 이걸 좀 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이런 패턴들이 경기를 거듭하면서 고착화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선 지난 세 경기로 퉁쳤지만, 거슬러올라가면 인테르, 발렌시아 전도 비슷한 양상이었거든요. 그나마 그땐 상대가 이런 부분들을 제대로 파악하고 공략한다는 느낌도 적었고 무엇보다 결과를 좋은 쪽으로 끌어내면서 유야무야 넘어갔던 건데 이젠 결과마저 나쁘게 나오고 있습니다. 과정이 좋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올 수는 있지만, 과정이 나쁘면 좋은 결과는 가져올 수가 없어요. 뭐 누가 폼이 박살이 났고 로테이션이 안되고 베스트 라인업이 없고 등등 문제를 삼으려면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요소들도 제법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기본 방향 설정이 많이 어긋나 있다는 거고 이걸 되잡지 못하면 앞으로의 시즌 운용도 많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3연전을 점검 알람으로 삼아 10월 경기들부터는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 보겠습니다. 마침 일정이 미뤄져서 시간도 약간이나마 더 생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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