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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경기 리뷰

결승전 감상

 

1.

개인적으로 벨링엄을 톱에 놓고 호드리구를 왼쪽으로 보내 한쪽에 힘을 실어 뚫어버리는 양상을 예상했는데 실제 스타팅은 벨링엄을 미드필드에 배치해 체급차를 활용해 상대를 찍어누르겠단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전반전 양상은 상대에게 미드필드를 장악당해 유의미한 전진을 만들지 못하고 뒷키타카로 점유율만 잔뜩 먹다 상대에게 위험한 역습을 다수 허용하는 형국으로 흘러갔습니다. 중앙에서 차이를 만들어줄 벨링엄이 생각 외로 상당히 고전했던 탓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론 상대 측면 자원들이 너무나도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미들에서의 수적 열세를 상쇄시켜버린 게 가장 주효했습니다.

 

 

도르트문트의 기본 압박 형태는 퓔크루크를 양 센터백 사이에 배치하고 양쪽 윙을 풀백에게 붙이며 브란트가 카마빙가를, 자비처가 크로스를 쫓는 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크로스 견제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자비처가 미처 크로스를 쫓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크로스와 가장 가까운 선수가 본인의 마크맨을 포기하면서까지 크로스에게 빠르게 붙어주며 크로스의 발에서 공이 쉽게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크로스가 몹몰이에 나서주면 어딘가엔 빈공간이 생기기 마련이고 평소라면 세명의 젊은 미드필더들이 이 공간을 찾아 전개를 이어나갔겠지만 이번 결승에선 앞서 말했듯 도르트문트의 측면 선수들이 이를 캐치하고 정말 빠르고 부지런하게 미드필드로 붙어주면서 이러한 우위를 저지시켰습니다.

 

 

미드필드에 4명을 배치하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이 공간을 장악당하니 크로스가 점점 뒤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도르트문트가 잘 캐치한 것은 크로스 주변의 마드리드 측-후방 선수들이 볼을 능숙하게 앞으로 보낼 수 있는 선수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뤼디거가 그나마 롱패스 옵션이 있긴 한데 지속적으로 볼을 때려넣을 상황도 아니었고 크로스 지근거리의 멘디와 나초는 애초부터 크로스 의존도가 높은 선수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전반 막판으로 갈수록 크로스 견제는 퓔크루크가 도맡아 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미드필드를 점거한 채 본인들의 마크맨을 적당히 풀어놓습니다. 어차피 별 위협이 안되거든요.

 

 

 

 

2.

중앙 장악이 틀어막혔기 때문에 측면에서 자체적으로 힘을 내줬어야 했는데 전반전 마드리드의 측면 공략 역시 상당히 아쉬웠습니다. 얼마전 레매 채팅창에 우측면 호드리구-발베르데-카르바할 간 시너지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비해 너무나도 안나온단 얘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결승을 대비해 뭔가 준비는 한 것 같은데 실제 경기에선 여전히 유효하지 못했습니다. 3인 콤비네이션 플레이보다는 셋중 둘이 번갈아가며 가담하는 원투패스 콤비네이션을 준비한 것처럼 보였는데 뭔가 되려고 하면 실수가 나오거나 마무리에서 세밀함이 부족한 모습만 나와 제대로 상대를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이마저도 전반 막판으로 갈수록 뒷키타카 비중이 늘어나면서 빈도도 줄어들었고요.

 

 

이러면 마드리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비니 해줘 뿐인데 팀이 미드필드를 장악하지 못하니 볼을 받고 속도를 붙이기 위해선 비니도 터치라인에 붙어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 안첼로티의 인터뷰에서 나온 두명을 뚫어야만 골대를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나와버렸고 그나마 비니를 도울 수 있는 벨링엄까지 상대에게 꽁꽁 묶여 있으니 부담이 너무나도 큽니다. 뤼에르손의 마크도 타이트했고 이걸 뚫어내더라도 올시즌 절정에 다다른 폼의 훔멜스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전체적으로 잘 풀리지 않으니 좀 무리하거나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모습도 나왔고요.

 

 

측면에서의 압박에도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니와 호드리구가 측면으로 볼을 몰아가서 상대 풀백들이 볼을 잡았을 때 강하게 붙어주면서 선택지를 줄이는 방식의 압박 형태를 짜왔는데 마트센과 뤼에르손이 생각보다 크게 당황하지 않고 볼을 잘 처리하기도 했거니와 메짤라인 브란트와 자비처가 터치라인까지 붙으며 계단식 전진 구조를 만들었을 때 마드리드의 중앙을 지키는 크로스와 카마빙가가 미처 쫓지 못하면서 측면에서 너무나 쉽게 속공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속공을 다수 허용하다보니 당연히 미드필드 저지선에도 문제가 생기고 라인을 통과하는 패스를 연속으로 허용하면서 정말 위험했던 찬스들을 여러 차례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3.

쿠르투아의 힘으로 전반을 간신히 넘긴 마드리드의 대응은 전방 구조를 바꾸는 거였습니다. 상대가 후방에서 공을 잡았을 때 전반엔 비니와 호드리구가 1선에서 상대를 쫓았는데 후반엔 팀에서 압박을 가장 잘하는 벨링엄과 발베르데가 전면에 섰습니다. 대신 비니와 호드리구는 상대 풀백을 맡아 필요하면 수비라인까지 내려가며 4-5-1 혹은 5-4-1의 형태로 수비 대형을 갖추며 상대를 충분히 끌어들이는 것에 중점을 뒀습니다. 우리가 지공으로 공간을 만들지 못한다면 상대를 좀더 끌어들여 상대 공간을 벌려놓으면 된다는 판단과 비니리구라면 상대 풀백과 동타이밍에만 출발하면 결코 뒤쳐질 일은 없다는 확신이 있기에 내린 선택으로 보입니다.

 

 

마드리드가 내려앉자 도르트문트는 마트센을 중앙으로 끌어들여 공격 숫자를 유지하고 변수를 창출하려 했습니다. 호드리구가 마트센을 쫓으면 왼쪽 측면에서 아데예미와 카르바할의 1대1 상황을 만들 수 있고 마트센을 쫓지 않고 측면에서 자리를 지킨다면 이미 확보해둔 공격 숫자 덕에 별 견제 없이 중앙에서 하고픈 플레이를 마음껏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후반 초반 마드리드를 꽤나 고전케 했습니다. 견제가 없을 때마다 반대편 측면으로 때려넣는 킥 때문에 비니와 벨링엄이 번번히 뤼에르손을 쫓아 터치라인까지 내려가야했고 이것 때문에 내려앉았음에도 제대로 역습을 시도하기 어려웠죠.

 

 

이런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건 대략 60분 전후였습니다. 이미 전반전에 마드리드보다 4km 가량 더 뛴 도르트문트가 슬슬 오버페이스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거죠. 내려선 마드리드를 상대로 넓게 펼쳐놓은 공격진 때문에 전반처럼 빠르게 미드필드를 커버할 수 없었고 이 구멍으로 마드리드 전방 자원들이 슬슬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빠르게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마드리드의 몇차례 속공으로 상대를 밀어내고 다시 미드필드에서 주도권 다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도르트문트는 전반만큼 빠르게 미드필드를 커버하지 못했고 미드필드에서 스윙 작업이 일어나고 측면이 슬슬 열리면서 이제서야 마드리드가 원했던 양상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걸 가장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코너킥 숫자입니다. 60분 이전까지 단 두차례의 코너킥만 시도할 수 있었던 마드리드는 60분 이후로 6개의 코너킥을 얻어냈습니다. 측면에서 상대를 이겨내고 엔드라인 근처까지 전진해냈기에 코너킥 횟수가 늘어나는 거고 첫골도 코너킥으로 만들어냈죠. 프리시즌인지 시즌 초반 경기인지 잘 기억은 안나는데 킥찰 사람이 없어서 알라바가 코너킥을 차고 올라갈 사람이 없어서 카르바할이 박스 안에 들어가있는 걸 보고 속으로 이팀 진짜 어쩌려고 이러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시즌의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이렇게 결실을 맺게 되네요. 참 신기한 일이에요.

 

 

페이스가 넘어온 시점에서 격차가 벌어지게 되니 도르트문트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촘촘했던 미드필드 장악은 온데간데없고 개개인의 간격뿐만 아니라 라인간 간격까지 벌어지니 수비는커녕 공격도 제대로 안됩니다. 이런 경기 양상을 가장 좋아할 만한 선수가 카마빙가입니다. 공세든 수세든 1대1로 마주하는 상황에 가장 강한 선수니까요. 득점 이전부터 전방으로 슬슬 움직이더니 득점 이후로는 대놓고 박스 근처까지 올라가서 날뛰었습니다. 전반 쿠르투아 쇼에 비견할 만한 코벨 쇼타임이 아니었다면 공격포인트 하나쯤 찍을 만 했는데 아쉽게 됐죠.

 

 

 

 

4.

돌이켜보면 이번 시즌을 이렇게 성공적인 성과로 마무리할 거라 생각한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조차도 예전처럼 축구를 딥하게 챙겨보기 어려운 시기에 도달했고 시즌 준비하는 걸 보면서 이런 상태로 한시즌을 온전히 날수나 있을까란 생각이 들어 기대치를 많이 내려놓고 경기도 꽤 드문드문 챙겨본 편인데 제 비관적인 예상을 멋지게 깨줘서 오히려 감사한 시즌이 되었네요. 오랫동안 함께하며 너무 익숙해져서 조금은 식어가던 팬심에 다시 한번 불을 붙여준 시즌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스쿼드 구성원 개개인의 평가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만한 시즌이 될 테죠. 안첼로티는 물론이고 크로스, 카르바할, 뤼디거같은 선수들은 커리어 만년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에 아주 커다란 변곡점을 만든 시즌으로 남을 것 같고 비니, 벨링엄, 카마빙가같은 젊은 선수들에겐 전설의 위대한 시작으로 기억될 만한 시즌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나 제가 기쁜 건 크로스와 카르바할처럼 팀에 몸담은 기간 내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음에도 팬덤 내에서조차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 외부에서 더욱 후려쳐지던 선수들이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저는 이 두 선수의 최고의 시즌은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전성기에 준하는 시즌을 잘 치르고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진짜 절정에 있었던 시즌들도 재평가를 받게 되겠죠.

 

 

다음 시즌엔 또 대대적인 선수 보강이 있을 모양입니다. 몇년간 그토록 기다렸던 선수도 오고, 남미 최고의 재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어린 친구도 오고, 스쿼드에 비게 될 몇몇 자리들에 대한 보강도 이뤄지겠죠. 제가 아주 사랑했고 팀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맡던 선수가 떠나는건 많이 슬프지만 이번 시즌을 겪어본 바 이제는 먼저 크게 걱정하고 비관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번 시즌이 저에겐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었으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메워낼 거라 믿어요. 더 강해질 팀을 기대하며 지금의 기쁨은 충분히 누리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길 바라요. 긴 시즌 응원하느냐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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