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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ball/경기 리뷰

vs 맨체스터 시티(A)

 

 

개털린 경기 자세히 들여다봐야 비참함만 늘어나니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제가 1차전 얘기를 하면서 마드리드가 잘한 점으로 미드필드를 내주더라도 박스 앞 공간을 집중력 있게 틀어막으면서 양 풀백이 시티의 양 윙을 온전하게 시선에 넣으면서 수비를 하던 걸 꼽았었는데 이에 대한 펩의 해답은 후방 인원들을 박스 앞으로 대거 투입하는 거였습니다. 로드리와 스톤스가 진을 치고 있는 수비 라인 앞까지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수비 라인 사이까지 들어와서 볼을 주고받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아칸지랑 워커까지 수비 라인 앞으로 들이밀어버립니다.

 

아칸지의 1,2차전 히트맵 비교. 1차전(좌)에 비해 2차전(우)에서 더 높은 지역까지 자주 올라왔다.
첫번째 실점 직전 장면. 스톤스가 측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는데도 워커가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같이 박스 근처까지 올라와 있다. 크로스와 카마빙가의 수비가 아쉬웠던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구역에 상대가 4명이나 들어와 있다는 거 자체가 이미 망한 거다.

 

수비하는 입장에선 직접 상대해야 하는 인원이 늘어난 것도 빡센데 머지않은 곳에 새로운 선수가 슬금슬금 올라와있으니 생각해야 할 게 더 많아지는 겁니다. 이 선수가 볼 흐름에 별 관여를 안하고 볼이 가도 별로 위협적이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주하는 수비의 시선 한번만 끌어내도, 그로 인해서 몸 각도를 약간만 틀어주더라도 볼에 주로 관여하는 동료 선수들의 발이 풀리고 이로 인해서 상대 수비 전체를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겁니다. 일례로 아칸지의 경우 필요한 만큼 왼발을 못 쓰니까 시티의 필드 플레이어 중 공을 잡았을 때 가장 덜 위협적인 선수였고 그로 인해 1차전에선 상대하던 호드리구가 별 신경 안쓰고 미들에 힘을 보태거나 측면 협력 수비에 나서곤 했었는데 이번 경기에선 아예 박스 앞까지 쭉 올라와버리니 호드리구 입장에서도 지난 경기처럼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두세 걸음 전진하는 것만으로 마드리드 3선의 수비 결속력을 낮춘 겁니다.

 

로드리의 1,2차전 패스맵 비교. 마드리드 진영에서의 패스 숫자가 훨씬 늘어난 건 물론이고 측면으로 향하는 패스 길이도 더 길어졌다.
스톤스가 저지선 사이에서 측면으로 패스를 너무 쉽게 보내는 것도 문제인데 스톤스 볼이 발에서 떠나는 상황에서도 카르바할이 그릴리쉬 쪽을 신경도 못쓸 정도로 측면 견제가 아예 안된다. 10여분 만에 수비 시스템이 아예 망가진 상황.

 

3선의 저지력이 무너지고 라인이 뒤로 자꾸 밀리니까 당연히 양 풀백들도 윙을 온전히 시선에 두면서 수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 귄도안과 로드리가 중앙에서 사선으로 윙에게 공을 직접 뿌리게 되고 이걸 받은 윙들은 주도권을 갖고 1대1에 나설 수 있습니다. 풀백들이 1대1 매치업에서 버거워하니 3선에서 도움을 주러 나가야 하는데 그럼 귄도안과 덕배는 살판이 납니다. 구멍 숭숭 난 마드리드 수비진 사이를 마음대로 헤짚고 다닐 수 있는 겁니다. 박스 안을 드나드는 건 물론이고 윙이 공을 달고 어그로를 끌 때 이 둘이 아예 한쪽 측면으로 같이 움직여서 공을 이어받아 둘이서 측면 플레이를 다시 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나왔습니다. 이쯤 되면 수비수들은 그냥 공 따라서 똥개훈련 하는 겁니다.

 

호드리구의 1,2차전 히트맵 비교. 그래도 우측에 기반은 확실하게 두고 움직이던 1차전(좌)에 비해 2차전(우)은 볼 받는 위치가 중구난방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능동적인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이뤄졌다는 거다.

 

이런 흐름에서 마드리드가 가장 못한 건 턴을 잡았을 때 시퀀스를 전혀 이어나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축구를 완전한 턴제 게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팀이 공을 쥐고 사전에 설정한 계획대로 게임을 풀어가는 동안은 공을 쥔 팀이 턴을 쓰고 있다고 봐도 될 겁니다. 턴을 잡은 팀은 공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서 본인들만의 리듬을 만들고 그걸 기반으로 상대를 물러나게 하여 상대의 플랜을 망가뜨리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나 경기 내내 턴을 독점하는 축구를 지향하는 시티 같은 팀을 상대한다면 이게 훨씬 중요한데 공을 갖고 도무지 올라가질 못하니까 그냥 시종일관 두들겨 맞았던 겁니다. 제가 이정도로 망한 경기에서 특정 선수 찝어서 얘기하는 건 별 의미도 없고 그냥 욕받이 세우는 거라 생각해서 지양하려는 편인데 솔직히 이번 경기 벤제마와 모드리치는 진짜 너무 너무 너어어어어어무 못했습니다. 후방에서부터 나오는 볼의 속도와 방향을 제어하기 위해 시티가 애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좌중앙에서 볼을 안정적으로 컨트롤하면서 속도를 붙여가야 할 이 둘이 너무 잦은 실수로 볼을 쉽게 잃어버리니까 시티가 굳이 물러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러니 비니시우스가 직접 볼을 운반하기 위해서 좌하단으로 내려오는데 시티는 그냥 워커를 붙여서 속도 경합을 시키는 걸로 대응해버립니다. 1차전에서 잘 먹혔던 워커에게 굳이 들이박지 않는다는 플랜이 완전히 무너진 거고 심지어 잘 뚫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호드리구까지 좌중앙으로 붙여서 왼쪽 숨구멍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이게 간헐적으로 이뤄지거나 자주 하더라도 발베르데가 보다 자유롭고 공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면 괜찮은데 발베르데가 똥받이로 활용되는 이번 경기에선 전혀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러면 리스크를 안으면서 크로스를 6번에 배치한 의의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작년 엘 클라시코 대패 때는 화가 많이 났었는데 이번엔 화가 나기보단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팬질 하던 시간동안 이런 감정을 느낄 포인트가 없던 건 아니지만 이번 건 좀 세게 오네요. 어려울 거란 예상은 애진작에 대진 짜여질 때부터 하고 있었고 좀 세게 맞을 수도 있겠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는데 각오했던 것보다도 더 세게 맞은 느낌이라 그런 거겠죠. 1차전 내용에 너무 도취되어 오만했던 건 아닌지, 팀의 황금기를 이끌던 세대의 사이클에 종지부가 찍힌 게 아닐까 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떠들어봐야 더 암울해질 것 같으니 굳이 구구절절 적지는 않겠습니다. 비슷한 걸 느꼈다면 구단 내부에서도 변화가 있겠죠. 시즌을 돌이켜보면 중간에 월드컵이 끼면서 되게 이상한 시즌이 되어버렸는데 선수단과 코칭스탭은 그 와중에도 애 많이 썼다 싶고, 바라는 게 있다면 다음 시즌 준비 잘 해서 중간에 흔들리는 모습만 안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보시는 분들도 수고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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